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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일반통행로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

by 소연(素淵) 2013. 1. 22.

역사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진보도 항상 그때그때의 일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즉 만약 후자가 학문의 영위에 속할 뿐만 아니라 학문의 집적에도 속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 그러나 사실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과정 속의 모든 단계는(-역사 과정 자체의 모든 단계와 마찬가지로-) 설령 선행하는 단계에 의해 조건지어진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취급을 요구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전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N 10,1)

- 벤야민,<아케이드 프로젝트>

 

진보는 지금 한걸음 부터이다.

진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1. 사료와 식사, 혹은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사료와 식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벤야민은 먹는다는 것은 공동생활 속에서만 정당한 의미를 갖기때문이라 생각한다. 음식은 나누고 함께할 때만이 비로서 음식다워진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광이 없다.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한 자리에 둘러앉아 나누는 사교상의 대화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강신주 선생은 벤야민의 사료와 식사에 대해 완전 공감하고 계신다.

 

수강생들 태도로 보아 여자와 남자의 차이도 있는 듯 하지만

역시 음식의 덕목이 '나누어줌'이라는것 아닐까?

 

대화보다도 침묵의 나누어줌이 우리 인간을 더 인간답게 그리고 따뜻하게만드는 법이다. 

인간의 모든 다툼은 기본적으로 음식으로 수렴된다고 할수 있다. 혼자서 먹는 사람, 그리고 혼자서도 못 먹는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려는 것이 사랑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닌가. 반면 어떤 이유에서든 음식 먹기를 정확히 말해 음식을 나누어 먹기를 절제하거나 거부하는 순간, 경쟁심이 그리고 이어서 지배가 발생하는것 아닐까?

 

이 말을 듣다보니

혼자서도 맛있게 음식을 잘 먹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여럿이 모여서 먹는 번거러움보다 혼자서 살짝 먹는것이 더 편한 나를 잠깐 생각해본다.

음식을 함께 나누다 보면 관계개선도 쉬워진다.

하지만 우리문화의 패거리 문화도 함께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 더 권고해진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냥 생각쟁이가 된듯... 왜 이리 정리가 안돼는지 어수선하다.

 

2. 진보와 보수사이에서

 

진보적인 사람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회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혼자 스스로 가혹하게 사람과 무관하게 엄격하게 되곤한다.

그렇다면 이상을 기꺼이 버릴수 있을때 결국 이상을 이룰수 있는것 아닐까?

원효대사의 깨달음이 주는 지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페미니즘의 엄격성, 조폭성(?) 과 원칙에 매달리는 것들도 우리가 넘어야할 문제인듯 하다.

 

강신주 선생이 하신 말중에 진보적인 사람은 인간을 고문하지 않는다.

진보를 입은 사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 진보의 제스처를 구분할줄 알아햐 한다.

 

이성복 시인의 "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조상만 평전의 책 이름 " 사랑때문이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뿐 내 생각은 하나도 적을 수 없다.

감각...진보의 감각 만으로 일보를 나아갈수 있을까?

 

3. 둔감함과 깨어있음 사이에서

 

여자 점쟁이에게 미래에 대해 묻는 사람은 다가올 사건들에 대해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포기하는 셈이다.

그 내면의 소리는 그 여인들에게서 그가 듣게 되는 것보다  천 배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았다. 그를 이끄는 것은 호기심이라기 보다는 나태함이다. 그가 자신의 운명을 물어서 알아낼 때 보이는 순종적인 둔감함과 가장 닮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기 있는 자가 미래을 붙잡아 세울 때의 위험하고 급작스러운 손놀림 일것이다. 깨어있는 정신 상태야 말로 미래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저 먼 미래를 예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다. 전조, 예감, 신호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신체 조직을 물들의 파동처럼 통과해 간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이용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단 이 두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 비겁과 태만은 전자를 권하고, 냉정과 자유는 후자를 권하고 있다.

말이나 이미지로 매개되기 전에 그러한 예언이나 경고는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예언이나 경고가 지닌 생명력은 우리의 중심을 강타하여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거의 모르지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힘이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게을리 할 때, 오직 그때에만 그렇난 예언이나 경고는 해독된다. 우리는 그것을 읽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

<마담 아리안느, 좌측 두번째 안뜰>p162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땅에 오르다가 쓰러질 뻔 하자 양팔을 크게 벌리고 승리의 슬로건을 외쳤다.

" 나는 너를 품에 안는다, 아프리카여! "

 

미래의 위험을 충실한 지금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해석할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예감은 빠르게 잡는다 - 재빠르게

삶과 죽음의 시간은 호흡지간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호흡지간을 잡아라! 그렇다면 운명을 굴복시킬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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